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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오솔길/좋은 詩

11월







11월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11월  /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 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11월/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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