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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오솔길/좋은 詩

겨울 풍경과 반칠환 시

 

 

 

새해 첫 기적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한평생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도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도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먹은 죄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고요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짓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국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저 오실라나
토옥---- !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한 해 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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