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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갤러리/ 명화 감상

동양의 피카소 / 제백석 그림

 

◈ 동양의 피카소 / 제백석 그림


 

 




 




 




 




 




 




 




 




 




 




 




 




 




 




 




 




 




 




 




 




 




 




 




 




 




 




 




 




 




 




 




 




 




 




 




 

 




 




 




 




 




 

 

제백석(齊白石, 1864.1.1~1957.9.17)은 중국의 近, 現代에 배출한 가장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야만 알 수 있지만 그의 그림은 보면 비록 똑같게는 그리지 않았지만 중요한 부분이나 의미만을 강조하였기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있다. 그의 본명은 순지(純芝)이며 후에는 명황(名璜)으로 하였으며 字는 위청(渭淸), 란정(蘭亭), 號는 빈생(瀕生), 백석산인(白石山人), 기원(寄園), 기평(寄萍), 기평당주인(寄萍堂主人), 노평(老萍), 평옹(萍翁), 기환선노(寄幻仙奴), 아지(阿芝), 목거사(木居士), 로목(老木),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행자오로민(杏子塢老民), 차산음관주자(借山吟館主者), 차산옹(借山翁), 성당로옥후인(星塘老屋後人), 상상노농(湘上老農)등 많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는 1864년 1월 1일(기념관에 명시된 날짜임)날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 행자오성두당(杏子塢星斗塘)에서 아버지 세정공(貰政公)과 어머니 주씨(周氏) 사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8세 때에 외할아버지인 주우약(周雨若)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1년 후에는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집에서 소 키우고 장작을 패면서 지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여 항상 붉은 종이에 인물, 화분, 동물들을 그리는 연습을 하였다. 15세가 되어서 같은 고향에 사는 제선우(齊仙佑), 주지미(周之美)를 스승으로 모시고 목공을 배우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살아있는 나무를 대충대충 다듬는 일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정교한 목공기술인 꽃을 조각하는 기술을 배워 고향마을에 그의 솜씨가 점점 유명해 지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어서 芥子園畵傳-이 화보집은 明,淸 두 왕조에 거처 배출한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과 지혜들이 담겨져 있고 200년 이상 내려오면서 증보되어 완성되었으며 그림을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최고의 권위를 가진 책으로 공인되어 있다. 옛날에는 관가에서 직접 판매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문인묵객들이 가장 소장하고 싶어 하는 품목이다>을 구입하여 등잔불 밑에서 끊임없이 연습하여 처음으로 화법(畵法)에 대하여 깨닫게 되였고 꽃을 조각하는 중에서도 시간이 나면 신상(神像)-玉皇, 財神, 火神, 竈君(부엌 신), 龍王-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1888년에 와서 상담(湘潭)의 紙紮匠 출신의 화가인 소전흠(蕭傳鑫)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식으로 초상화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후에 소전흠(蕭傳鑫)의 소개로 또 다른 초상화 스승인 문소가(文少可)를 알게 되어 두 사람으로부터 초상화에 대하여 배우게 되였다. 다음해인 1889년도에는 상담(湘潭)의 명사인 호자탁(胡自倬), 진작훈(陳作壎)을 스승으로 모시어서 호자탁(胡自倬)으로부터는 꽃, 새, 풀, 벌레등을 그리는 공필(工筆-밀화의 기법)를 배웠고, 진작훈(陳作壎)으로부터는 시문(詩文)을 배웠다. 이때부터 그의 초상화는 그림의 중앙에는 부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휘장, 토시, 신발등을 사용하였으며 다시는 찾아보기 힘든 목공에서 전문화가로서 성공하였다. 1890년부터 1891년까지 그는 생활을 위하여 그림을 팔았고 아울러 당시(唐詩), <孟子> 및 <聊齋志異>등과 같은 明淸時代의 소설을 어렵게 독학을 하였다. 그는 70세가 되어서 <往事示兒輩>라는 詩 한수를 지었는데 내용은 “村書無角宿緣遲, 甘七年華始有師, 燈盞無油何害事, 自燒松火讀唐詩”다. 이때부터 그는 초상화뿐만 아니고 산수화, 인물화 및 花鳥草蟲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美人圖를 많이 그려 사람들이 그를 齊美人이라고 불렀다. 1894년, 제백석(齊白石)은 고향이 같은 왕중언(王仲言), 나진오(羅眞吾), 나성오(羅醒吾), 진복근(陳伏根), 담자관(譚子荃), 호립삼(胡立三)등 7명과 용산시사(龍山詩社)를 만들었고 나이가 제일 많아 회장을 맡았는데 그들은 시간만 나면 만나서 시를 지어서 일반 사람들이 “龍山七子”라고 불렀다. 그의 시는 형식에 억매이지 않으나 음률이 뛰어나고 성정(性情)을 적절하게 잘 표현하였으며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제백석(齊白石)은 호자탁(胡自倬)등으로부터 서예를 배웠으며 하소기(何紹基,1799~1873, 서예가, 號는 東洲居士, 湖南道州출신)와 똑같이 쓰려고 노력하며 아울러 금문,예서,전서등도 공부하였다. 1896년에는 또다시 전각(篆刻)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정용홍(丁龍泓), 황소송(黃小松)등 두사람의 도법(刀法)을 배웠다. 또한 그는 최초의 인우(印友)인 여송안(黎松安)의 객방에 상주하면서 돌을 갈고 칼을 갈며 인술(印術)을 연마하였다. 1899년, 장중양(張仲颺)의 소개로 상담의 유명한 시인인 왕상기(王湘綺)를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1900년, 그림을 판 돈으로 성두당(星斗塘)부근에 있던 매공사(梅公祠)를 구입하여 입주하였으며 새롭게 서재를 만들고 이름을 “借山吟館”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서 1년동안 수백수의 시를 지었다. 바로 두 세기가 교차하는 시기에 제백석(齊白石)의 시(詩), 그림(畵), 전각(篆刻)은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꽃을 조각하는 유명한 목공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었으며, 한명의 이름있는 예술가로 사대부 인문을 수양한 민간화의 스승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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